조르조 아감벤 외,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공부



 

오늘날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국가 혹은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는 우리 바로 이웃에 위치한 독재 국가에서도 스스로를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혹자는 이 사실로부터 민주주의의 위상이 과거와 다르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한 때 사회 진보의 결정적 척도였던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들은 더 이상 진보의 최전선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때로는 정치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훌륭히 정착했으므로, 다시 말해 정치적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혁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반대편에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개념이 유효함을 부르짖는 이들이 있다. 시대와 공간에 따라 결은 다양하지만, ‘지금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근본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현대에도 역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이며, 따라서 오늘날의 시급한 문제 역시 다른 무엇이 아닌 정치다.

 

민주주의를 키워드로 외국 학자들의 글을 엮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에서도 이러한 구도는 주된 주제로 등장한다. 필자들은 현재의 민주주의 담론을 표면적으로 조금씩 다른,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의미의 문장으로 요약한다. “우리 사회에서 모든 이(...) 민주주의자이다.”(알랭 바디우, 29) “민주주의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정치 스펙트럼을 망라해 칭송받고 있다.”(웬디 브라운, 86) “오늘날 민주주의는 무의미의 전형적인 사례가 됐다.”(-뤽 낭시, 107) “오늘날의 시대는 스스로를 탈이데올로기적이라고 선포한다.”(슬라보예 지젝, 167) 우리는 이 책의 기획 책임자인 에릭 아장이 자크 랑시에르에게 던진 질문에서 이런 일치점이 우연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렇게나 다의적이며, 이렇게나 서로 다른 것을 포함하는 단어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닳아빠진 단어가 아닐까요? 단어들의 마모는 분명 존재하니까 말입니다. ‘공화국이란 단어를 예로 들어보죠. 1825년에 우리는 공화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왕의 목을 베었습니다. 오늘날 그 단어는 더 이상 아무 뜻도 없죠(131)

여기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왕의 목을 베면서 요구했던 천부인권의 권리와 민주적 평등은 당대 사회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행동이었지만, 극좌부터 극우까지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현대 프랑스에서 공화국혹은 민주주의는 진보라기보단 진부에 가깝다. 모든 정당이, 나아가 모든 사람이 그들의 명백한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개념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한다면, 그 개념은 사회 문제의 해결보다는 은폐를 조장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에릭 아장의 질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히 부정적인(혹은 위악적인) 관점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 이는 필자들의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다소 의도적인 질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질문을 책의 기획 의도이자 필자들이 마주했던 문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제에 대한 대답들을 묻는 것이 독자의 다음 질문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실린 모든 필자들의 대답을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비교적 명료한 논지를 가진 웬디 브라운의 글을 통해 우리는 여러 필자들의 대답 중 공통적인 부분, 즉 그들의 근본적인 입장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는 민주주의는 역사상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8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그것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껍데기”(88)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현대 대의 민주제는 여러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리스 민주주의democracy가 표방했던 인민demos의 통치cratie라는 본질적 의미는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기업의 권력이 정치 영역을 침식했다는 것이다. “학교, 군대, 감옥에 이르기까지 국가 기능이 광범위하게 아웃소싱되고 (...) 자본의 전 부문에 걸쳐 직접지원과 구제금융을 줄기차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금, 환경, 에너지, 노동, 사회, 재정, 통화정책을 통해 자본축적의 기획에 뻔뻔하게 연루되어 있다”(88)는 것이다. 즉 오늘날 국가는 기업에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을 통치행위의 제일원리로 삼고 있다. 둘째, 국가 통치 행위의 왜곡을 견제할 제도가 돈과 미디어에 의해 변질되었다. 대의 민주제의 핵심적 원리이자 근본적 정당성의 수단인 “‘자유선거는 (...) 마케팅과 경영의 서커스로 전락했다는 것이다(89). 마지막으로, 정당성이 아닌 효율성을 원리로 삼는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합리성의 기준으로 부상하면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기업가적 원리로 대체”(90)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공공연히 인민의 지배가 아니라 경영관리 운용의 구현체로 탈바꿈”(90)했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법원의 판결이 정치 절차의 정당성을 압도하는, 즉 입법부 위에 사법부가 군림하는 현상과 국가 주권의 쇠퇴, 그리고 테러리즘의 대두에 따른 강력한 안보정책의 시행 역시 민주주의 전복을 초래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국민국가가 쇠퇴하면서 인민이라는 존재 자체의 의미가 약화됐고, 자본 권력이 강해지면서 인민들의 권력 접근 가능성이 심하게 축소되었다는 것이 웬디 브라운의 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웬디 브라운의(그리고 이 책에 참여한 다른 모든 필자들의) 지적은 오늘날 여전히 우리가 민주주의를 사유해야 하는 까닭을 잘 말해준다. 민주주의는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고, 정착될 수 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항상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이상적 민주주의를 사고해야만 한다. 특히 민주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자본 권력이라는 존재는,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에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민주주의의 완성, 혹은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담론에 대해 우리는 명확한 거부를 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2011년을 살아가는 한국의 시민이라면. 위에 언급한 에릭 아장의 질문에 대해 자크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평범한 프랑스 지식인에게 민주주의는 텔레비전 앞에 주저 앉은 슈퍼마켓 고객의 군림이나 다를 바 없겠죠. 하지만 제가 얼마 전에 다녀온 한국에서는 불과 20년 전에야 독재가 무너졌고, 국가기계로부터 분리된 집단적 힘에 대한 어떤 생각 같은 것이 인민이 거리를 메우는 스펙터클한 형태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물론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발명됐던 서구에서는 그 단어의 마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 단어는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132)
 

비단 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이 책의 필자들이 지적하는 문제들은 뼈아프게 다가온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담론에도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에서 다뤄지는 문제들은 주요한 주제로 부상한 바 있다. 예컨대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 발생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의 원인이 정치, 특히 정당 체제의 허약함에 있다고 지적하며, 민주화가 완성되었다는 관점들을 비판한다(최장집 2007). 그는 민주주의를 둘로 나눠 이해하는 단계적 관점, 특히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는 관점을 비판하며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다수 민중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효능을 갖도록 하는 것은 곧 정당의 몫”(최장집 2007, 86)이라고 주장한다. 최장집의 비판과 그로부터 촉발된 논쟁들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여전히 한국 정치 담론에서 민주주의를 성찰해야 할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론상의 논의를 넘어서서 현실 정치에서도 그 필요성은 드러난다. 예컨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외치며 거리를 점령한 시민들의 모습을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말고 다른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실제로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지와 관계없이, 여전히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정치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는 한국 사회에도 시의적절한 문제제기를 던지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르조 아감벤 외 저. 김상운, 양창렬, 홍철기 역.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2010. 서울: 난장.

 

최장집, 박찬표, 박상훈 저. <어떤 민주주의인가>. 2007. 서울: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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